2001년 6월. 대학 졸업을 일주일 앞두고 저는 KBS 국제방송 영어 라디오 진행자 오디션에 덜컥 합격해버렸습니다. 오디션을 보던 날 저는 난생 처음 방송국 스튜디오 마이크 앞에 앉아 “내게 오는 길”이라는 발라드곡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가수 성시경을 인터뷰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영어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해왔습니다. KBS, EBS, TBS eFM, 아리랑 국제방송에서 시사, 교양, 음악, 여행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면서 국제회의 통역사, 국제행사 MC, 번역가, 영어 성우, 대형 소속사 K-Pop 아이돌 그룹의 영어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부터는 미쉐린 가이드 서울의 초대 에디터로 활동하며 한국의 미식 문화를 알리기도 했고, 2019년에는 식품 제조업에 뛰어들어 가정 식사 대체 식품을 개발하여 마켓 컬리에 판매하기도 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바쁘게 지내던 2019년 가을, 저는 거꾸로캠퍼스라는 이름도 신기한 학교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날 친한 대학 선배로부터 학생들에게 글로벌 마인드셋(mindset)을 심어줄 수 있는 영어 교사를 찾고 있는 고등학교가 있다고, 한 번 지원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기회에 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학교’라는 곳은 저에게는 최후의 선택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부담스럽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에서 태어나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학창 시절을 보낸 저에게 한국 교육은 풀어야 할 실타래들이 너무 많은, 잡음투성이이지만 그 누구도 실질적으로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 거대한 코끼리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 생각을 읽은 선배는 한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일반 학교가 아니야. 방문해서 헤드 티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수업 참관도 해 봐.”
선배에 대한 신뢰 반, 호기심 반으로 저는 그날 아침 방송을 마치자마자 혜화동으로 향했습니다. 거꾸로캠퍼스 헤드 티처와 면담을 하고, 학생과 교사들의 모습을 멀찌감치 지켜보았습니다. 수업이 한참 진행 중인 공간은 시끌벅적했고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떠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습니다. 수업 중인데도 일부 학생들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간식도 먹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아이들을 제지하는 교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교실 앞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없었어요. 교사들은 모둠으로 앉아있는 학생들에 묻혀 일대일로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 학교에는 교무실이 없나?”, “학년제가 없다더니 학생들이 모두 한 공간에 모여 있네.”, “여기는 교사보다 학생들의 목소리가 더 크군.”
그날 무엇이 저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학생이 주도하는 배움과 성장? 이런 교육이 한국에서 가능하다고? 시험이 없고 성적표가 없어? 이게 가능해?” 집으로 가는 내내 저의 머릿속을 지배한 질문은 “이런 교육이 실현 가능할까?”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알 수 없는 희망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뉴얼도 정답도 검증된 결과도 없지만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교사, 학부모, 학생들의 용기가 저를 움직였던 것 같아요. 나도 이 움직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교사는 아니지만, 그동안 쌓아온 나의 전문성으로 거꾸로캠퍼스의 성장에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질문을 안고 거꾸로캠퍼스에 정식 교사로 합류한지 만 3년이 지났습니다. ‘예티’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고, ‘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스럽고 생기발랄한 학생들과 매일 함께 성장해나가고 있어요. 저는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제일 즐겁습니다. 방송 준비를 위해 매일 아침 국내외 뉴스를 꼼꼼하게 챙겨 읽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흐름이 보입니다. 이것은 제가 수업을 준비할 때에도, 문제정의 프로젝트 코칭을 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뉴스를 읽으며 학습 자료를 스크랩하기도 하고,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최신 이슈들을 학생들에게 소개하기도 합니다. 학생들로부터 ‘영어 수업을 통해 글로벌 시각을 키울 수 있었다’ 또는 ‘영어에 대한 부담감이 많이 줄어들었다’라는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교사” 예티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는 ‘방송인’ 예리카가 있었기에 지금의 ‘교사’ 예티가 있다고 믿습니다. 평생 교사로 살아온 존경하는 동료들과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캠의 영어 교사로, 프로젝트 코치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꾸로캠퍼스에 오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꾸로캠퍼스 교사 박수연(예티) <저작권자 ⓒ 참교육 학부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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