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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는 시스템의 말
제목부터가 이미 관객에게 역설을 던진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책임을 유예하고, 잘못된 현실을 정당화하는 가장 흔한 표현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말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영화에서 그 말은 회사 고위 관리자의 입에서 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처음 쓰였다. 결국 그것은 ‘시스템의 언어’였고, 개인이 아니라 구조가 던진 말이었다. 그 말이 개인에게 고스란히 전이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영화는 태양 빛이 가득한 하늘 아래서 나무를 비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회사에서 받은 선물인 장어로 정원에서 바비큐를 즐기는 행복한 가족. 그러나 장어는 만수도 몰랐던 자신의 퇴직 선물이었다. 그 장면을 감싸는 음악은 처연하게 파국의 그림자를 예고한다. 만수는 자신이 25년간 일한 ‘태양 제지’에서 곧 해고당한다. ‘태양 아래 자라난 나무가 베어져 종이가 되는’ 구조처럼, 회사는 그를 잘라내며 효율의 재료로 삼는다.
그가 일한 제지회사는 ‘태양 제지’, 이후 등장하는 경쟁 회사는 ‘문 제지’다.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태양은 생명을 뜻하지만, 종이를 만들기 위해 그 빛 아래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잘려 나간다. ‘문 제지’는 말 그대로 ‘문제지’이기도 하다. 경쟁과 평가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사회의 초상이다. 동시에 ‘문’은 영어로 moon, 곧 ‘달’이기도 하다. 태양이 생명과 성장의 상징이라면, 달은 빛을 잃은 복제의 상징이다. 태양이 직접 빛을 내는 존재라면, 달은 그 빛을 반사할 뿐이다. 영화 속 ‘태양 제지’와 ‘문 제지’의 관계는 바로 그 빛과 그림자의 구조를 닮았다. 주인공 유만수는 태양의 세계에서 잘려 나가 달의 어둠 속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그는 결국 다른 생명의 빛을 지우며 자신의 미약한 생존을 반짝이려 한다. 나무와 종이, 벌목과 해고, 도끼질과 살인. 이 모든 단어가 영화 속에서는 같은 층위에서 반복된다. 인간의 존엄이 효율의 논리로 환원될 때, 사람은 결국 자르고 베는 대상이 될 뿐이다.
만수는 해고 후에도 시스템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 안에서 자신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만수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동료들을 적으로 인식한다.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숫자로 환원시키는 구조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술이 아닌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착각한다.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시대, 우리 또한 종종 비슷한 착각 속에 산다. AI보다 무서운 것은, 인간을 도구로 보는 시선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러한 비극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다. 피비린내가 나는 장면조차 유머와 리듬으로 감싸며, 관객이 웃음 속에서 섬뜩한 깨달음을 얻게 한다. 첫 번째 살해 대상인 구범모의 이름은 ‘모범’을 뒤집은 것이다. 그 역시 만수처럼 ‘모범적인’ 근로자였지만 해고된다. 범모의 아내 ‘아라’는 젊은 남성과 불륜을 저지르고, 그 광경을 지켜본 만수는 범모에게 연민을 느낀다. 만수는 범모에서 자신과 아내의 관계를 본다. 만수가 범모를 살해하려던 순간, 서로를 오해하다가 결국 범모는 아라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두 번째 대상 고시조 역시 평생을 제지 공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살았지만, 지금은 해고되어 구두를 팔며 생계를 이어간다. 만수는 그를 통해 자신과 딸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어쩔 수가 없다’며 아버지의 총으로 시조를 쏘아 죽인다. 이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한 사람 안의 또 다른 자아’다. 만수가 죽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며, 그가 파괴하는 것은 동료가 아니라 인간성이다. 그 장면이 아들 시원의 절도 장면과 병치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아버지의 폭력과 아들의 도둑질은 같은 구조의 반복이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세대적 유전,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잔혹한 유머다.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회사의 사훈이다. 하지만 만수는 멈추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행동만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회사의 사훈은 퇴직자 자조 모임의 구호로 변형된다. <멈췄으니까, 생각하고! 행동하라!> 멈춤은 실직을 의미하고, 행동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바뀐다. 이 반어적 문장은 영화의 전체 구조를 압축한다. 회사의 구호는 개인의 절규로 바뀌고, 시스템의 언어를 내재화한 인간은 타인의 향한 폭력을 통해 생존을 이어가려 한다.
색채와 음악의 대비도 인상적이다. 영화는 대부분 따뜻한 햇살 아래서 진행되지만, 내용은 점점 어두워진다. 조용필의 노래 ‘고추잠자리’가 살인 장면에 겹쳐질 때, 순수와 폭력이 한 화면에 충돌한다. 감독은 이 부조화의 미학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순을 시각화한다. 가장 화사한 순간이 가장 잔혹하고, 가장 평화로운 풍경이 가장 불편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화려한 세트 밖으로 나간다. 잘 꾸며진 공간을 벗어나, 벌목 현장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준다. 그곳에는 꾸밈도 연출도 없다. 잘려 나간 나무의 밑동, 땅에 흩어진 톱밥, 그리고 벌목 기계가 남긴 흔적들만이 처연하게 흩뿌려진다. 감독은 그제야 ‘진짜 현실’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웃음도, 핑계도 없다.
<어쩔 수가 없다>는 명백히 ‘각자도생’의 허상을 드러낸 영화다. 만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지만, 그 결과 가족도,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영화가 말하는 가족주의는 보호가 아니라 파괴의 이름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묻게 된다. AI와 경쟁, 효율과 생존이 교육의 언어가 되어버린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빨리, 더 많이’가 아니라 ‘함께, 오래’이다. 교육은 경쟁의 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 시작을 가르치는 일이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생각하기를 멈춘 인간이 내뱉는 자조적인 말이다. 아이들이 그런 말을 배우지 않도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정말, 어쩔 수 없었을까? 이 질문이야말로, 시스템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되돌리는 교육의 시작일 것이다. 송민수(거제지회, 홍보출판위원회 위원) <저작권자 ⓒ 참교육 학부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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