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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대학교』, 지금의 대학은 존재 가치가 있는가
우리는 이미 중고등학교가 대학 입시의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에 익숙하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대학은 더 이상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는다. 대학은 이제 기업의 요구를 전달하고 실행하는 기관이 되었다. 취업률, 산학협력, 기업 맞춤형 인재 양성이라는 말들이 대학의 존재 이유를 대신한다. 대학은 더 이상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어디에 써먹힐 것인가’를 먼저 계산한다.
그 변화는 강의실 안에서부터 드러난다. 필수교양은 삶을 성찰하는 언어 대신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기술 과목으로 채워진다. 영어와 경영학은 거의 모든 전공의 공통어가 되었고, 인문사회계열 학생들마저 복수전공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문법을 먼저 배운다. 인문학은 그 자체로 존중받기보다는, ‘상품가치’가 있을 때만 호출된다. 공과대학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길들이기가 작동한다. ‘공학인증’이라는 제도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업이 원하는 표준을 대학 교육에 깊숙이 이식한다. 교육은 점점 균질화되고, 질문은 줄어든다.
대학의 공간 역시 달라졌다. 가장 최신식 건물은 대개 고시 준비 전용관이다. 로스쿨, 각종 행정고시, 언론사 준비반, 공인회계사와 변리사 시험을 위한 전용 열람실이 캠퍼스의 중심을 차지한다. 대학은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경쟁의 대기실이 된다. 그리고 캠퍼스를 걷다 보면 더 노골적인 변화와 마주한다. 한때 대학 정문이나 강당에 걸려 있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문구는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진리를 대신하는 것은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대기업 카페, 편의점, 패스트 푸드점이 대학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이제 대학의 풍경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소비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학생은 시민이기 전에 소비자가 되고, 대학은 교육기관이기 전에 하나의 기업이 된다. 이곳에서 합리성은 더 이상 사회를 이해하는 힘이 아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주어진 문제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답을 고르는 능력이 합리성으로 통한다. 정치와 사회를 말하는 언어는 위험해지고, 비판은 공격적인 태도로 오해받는다. 말하지 않는 것이 성숙함이 되고, 침묵은 처세가 된다.
오찬호는 이런 대학이 만들어내는 인간상을 ‘죽은 시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구조를 말하지 못하고, 모든 문제를 개인의 노력과 선택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 힘에 굴복하면서도 그것을 합리적 선택이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10년 전에도 대학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속도는 더 빨라졌다. 미디어는 경쟁을 미화하고, 자기계발의 언어로 불평등을 가린다. 대학은 그 미디어의 언어를 가장 충실하게 재생산하는 공간이 되었다.
취업률과 산학협력 지표를 잘 관리하는 기관으로서라면, 대학은 이미 충분히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이 원하는 언어를 가르치고, 경쟁에 익숙한 개인을 길러내는 시스템으로서도 꽤 효율적이다. 그러나 시민을 길러내는 공간,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익히는 장소로서의 대학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의 대학에는 ‘진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학이 기업이 되는 순간, 진리는 불편한 것이 된다. 질문은 생산성이 없고, 비판은 관리 대상이 된다. 대신 캠퍼스는 소비로 채워지고, 학생은 고객이 된다. 그곳에서 배움은 선택 가능한 상품이 될 뿐이다.
『진격의 대학교』는 10년 전의 책이지만, 지금 읽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아이들은 어디에서 사회를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어디에서 틀릴 수 있는 말, 아직 결론 나지 않은 말을 연습할 수 있을까. 대학이 말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중고등학교와 가정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다. 정답을 잘 말하는 훈련이 아니라, 왜 이 사회가 이렇게 작동하는지 묻는 말을 허락해야 한다. 속도와 효율에 밀려 사라진 질문을 다시 꺼낼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의 존재 가치는 스스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건물의 크기나 취업률 같은 수치로 확보되지도 않고, 기업과의 협약 숫자로 보증되지도 않는다. 대학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정당성이 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제 대학은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질문이 사라지고, 말하기가 위험해지고, 시민 대신 관리 가능한 개인만을 길러내는 공간이라면, 그곳은 더 이상 교육의 이름으로 존속될 수 없다. 침묵을 학습시키는 제도가 배움을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학이 이 질문 앞에 다시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물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대학은, 과연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송민수 (거제지회) <저작권자 ⓒ 참교육 학부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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